올드스쿨 밸런싱과 5e에 대한 메모

 최근 트위터 등지에서 OSR에서 전투 밸런싱은 전혀 페어하지 않고, 오히려 전투를 하는 시점에서 패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궁극적으론 전투 없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이상적(실제로는 전투룰이 제일 재밌기 마련인 RPG에서 그게 성립 가능한 목표인가는 둘째치고)이라는 글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투의 페어함을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이후 세대 룰의 특징이며, 그야말로 두뇌 스포츠의 일환으로서 전투를 다루는 워게임 게이머였던 올드 스쿨 개발자이기에 그들이 워게임으로는 느낄 수 없는 모험의 스릴을 즐기기 위해 올드 스쿨 RPG를 만들 땐 역설적으로 단순한 전술적 두뇌대결은 신경쓸 필요성을 못느꼈던 겁니다.(처음부터 의도한 건지, 미처 깨닫지 못했는지는 별개로 두고)


 새삼 충격을 느꼈죠. 


 거의 밈처럼 소비되던, 초기 D&D의 '전투에 돌입하는 순간 급격히 쓰레기화하는 시프 스킬', '은신, 도주 외엔 템 셔틀 하프링' 같은 약체 클래스들을 저 위 주장을 토대로 다시 살펴본다면 정말 당시 개발자의 주장대로 '매우 밸런싱이 맞는' 세팅이었던 겁니다. 악랄하고 비합리적이기 짝이 없던 -그래서 고인물들을 강하고 치사하게 키우기로 유명한- 고전 D&D  어드벤처들의 구성들도 '문을 열고 뚜까 패는' 식의 구성이었을 때의 그 난이도가 되는 것이지, '은심, 잠입, 도주(+유혹, 아부)를 반복해가며 도전을 건너뛰고 보물 경험치로 레벨 업'이라는 전개를 기본으로 할 경우 생각보다 허점이 많은, 할만한 어드벤처가 되는 것이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핀잔을 사고 마는 D&D 5e의 전투 밸런싱. 사실상 한타 싸움이라 DEX 위주로 세팅을 강요받게 된다는 메커니즘도 이렇게 거꾸로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예컨테 전투 밸런싱 측면에선 그 어떤 판본보다도 우월하다는 D&D 4의 경우, 각종 재정비 능력과 순간적 상황 대응 능력을 거의 전 클래스가 최소 1~2개씩을 가지게 만들면서 한 타 전개를 피하고 서로 페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일방적인 전투가 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만, 어느 정도 전장 상황 파악이 끝나면 서로 수읽기 대결이 되거나 특정 루틴의 반복이 되어 전투신이 매우 루즈하고 때로는 의미없이 피로도만 쌓이는 '작업' 느낌을 받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5e는 D&D 나름의 -요새 식으로 표현하면- OSR을 만들고자 하는 목표로 만들어진 걸 숨기지 않았죠, 그런 것으로 볼 때, 개발진들의 5e 전투 밸런싱은 의도된 것이었던 겁니다.


 즉 '한타의 기회를 잡을 자신이 없다면 전투를 시작하지 마'가 개발진이 추구하던 5e의 전술 지침이었다는 것이죠.

 

 한 타의 '기회' 자체를 끌어내는데 특화되거나, '한 타''의 기회를 잡았을 때 유틸성이나 효율이 좋은 클래스들이 순간 화력이나 유지력에선 뭔가 나사빠진 능력임에도 상향하길 꺼려하는 것도 이 지점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고, 이른바 '슈퍼 DEX대전'으로 불리는 능력치 편중 문제도 실은 이 밸런싱 구조에서 플레이어들이 가장 단순하고 수동적인 해결책을 찾다보니 생긴 일종의 미스리드였던 것입니다.


 실은 5e야 말로, 각종 배경과 커뮤니티 관리를 통해 모험에 도전하기 위한 사전준비를 갖추고 교섭과 기만, 위협으로 무의미한 피와 철의 자원낭비를 피하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전투가 시작되면 적이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졸속을 각오하고 한 타 속전속결을 추구하는 방식, 올드스쿨의 약점이었던 공정성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선 극도로 전쟁에 가까운, 영웅적 비열함(?)을 추구하는 룰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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