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자본주의에 대해
가볍게 잡담 수준으로만... 사실 진지하게 파고들면 독서회라도 몇 번 하고 토론할 주제기도 하고, 저 개인적으로도 요사이 연재 준비 때문에 바빠서요.
현대인들이 성-사랑-결혼이 통합되어 있는 형태를 제일 이상적인 인간 관계로, 그것도 초역사적인 인간 본연의 감정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미 이 허구성에 대한 반박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력 혹은 상업 자본(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땐 사실 이를 딱히 구분하지 않긴 함)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귀결은) 가정이란 것을 본래는 그저 역사적 흐름으로 등장한 공동체의 한 형태에 불과한데도 매우 당위적인 것으로 교육해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사유재산을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박아두어 국가 제도라는 억압을 인민 스스로 필요로 하게 만든다는 비판이었던 거죠. 이에 대한 논의는 사회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꾸준히 내려와, 현재는 '가족공동체'의 범주와 형태를 새로 논의해야한다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성과 사랑 또한 일치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미셀 푸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죠. 그리스에서 '육체적 사랑'(=성)과 '플라톤적 사랑'을 구분한 이래, 성애와 연관된 소위 '열정적 사랑'(용어 자체는 근대 후기에 성립)은 근대 시점까지 최소한 서양에서는 종교나 노동에 반하는, 인간에게 배제되어야할 것으로 여겨졌고, 동양 문화권에 있어서도 '열정'과 '사랑'은 별개의 영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과거 동서양 막론하고 진정한 사랑은 '결혼' 내부에만 있었다 믿어졌고 이는 열정이 배제된 '동반자적 사랑'이었던 것이죠.
1990년대 중반 이후,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문예이론 비평가들은 문화컨텐츠를 기반으로 한 연구를 통해, 근대 후기 이후 소비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며 종래의 '열정적 사랑'과 매우 밀접하면서도 살짝 다른 '낭만적 사랑'의 개념이 새로 등장했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최소한 이 개념의 등장 자체에 한정한다면 이쪽에선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개념이 탈근대에도 남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찬반이 있을 뿐) '낭만적 사랑'은 이후 '사랑의 전형' 그 자체로서 현대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낭만적 사랑이 기존의 다른 사랑과 다른 특징은 자아와 타자간의 관계가 감정적 관계를 지속시키는 걸 전제로 한다는 것. 즉 로맨스(이야기)를 가져야하는 사랑의 양태라는 것이죠. 자신과 상대방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를 만드는 관계. 철저히 개인화되어, 사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야기를 형성해야 하죠. '열정적 사랑'과의 결정적 차이는 열정적 사랑이 자아가 타자 안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져버린다는 점에 비해 낭만적 사랑은 오히려 사랑을 통해 독립적 자유인으로서 자아 탐구를 할 수 있다는 것. 이른바 '공유하는 사적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낭만적 사랑은 그 발생 시기의 문제도 있고,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집단에서 먼저 발흥되어 다른 계급층으로 퍼져나간 문화기 때문에 열정적 사랑과는 달리, 결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설령 자신이 가진 낭만적 사랑의 '이야기'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 이야기에서 최고 갈등 요소는 결혼(이라는 억압? 압박?)이 되어버리는 식으로요.
한 편, 20세기 들어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서 소비자본주의로 변화하면서 '낭만적 사랑'은 세상에서 물질적 요소와 제일 거리가 먼 것으로,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 등으로 관념화되어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걸로 '착각'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로 착각에 불과하죠.
낭만적 사랑에서 '낭만적 분위기'는 감정이 아닌 '문화 기호'에 의해 창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맛있거나 특별한 음식, 문화체험, 비싼 선물. 여행. 모두 상업적인 소비와 연관되어 있죠. 단순한 취미 생활의 공유라 할지라도, 상업적 소비와 동떨어진 경우는 없습니다. 좋은 대화나 섹스는 비상업적 요소라고 생각하지만, '낭만적 분위기'가 주도하지 않은 가운데 이루어진 좋은 대화나 섹스는 기대하기 힘들죠. 애당초 '여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시점에서 그 개인은 (백수가 아닌 한) 매우 모범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 주체가 되는 겁니다.
낭만적 관계의 향유가 이처럼 소비와 연관되기 때문에 낭만과 빈곤이 공존하기는 어렵습니다. 빈곤한 삶에 사랑은 있을 수 있어도, 낭만은 없다는 인식도 이런 현실의 결과물인 셈이죠.
특히 사치는 실용성, 이윤을 초월한 영역에 있어서 일상을 벗어나 계급 해방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고 이를 공유하는 것은 매우 낭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결국 사랑을 다루는 문화형식 또한 빈곤보다는 사치를 중심으로 형상화되어 지배계급의 문화와 이해관계를 반영하게 되죠. 그나마 돈이 안들 것 같은 대화를 통한 상호 이해는 '교양'과 그 '상호이해'(의사소통 또한 학습과 심리적 여유가 필요한 능력이기에 갈등해소 수단과 감정교환 수단으로 작동하는 건 중상류층 이상으로, 그 이하인 경우 정보교류 이상으로 능력을 쌓아나가기 힘듦니다.)가 필수가 되기 때문에 이 역시 지배계급으로부터 기원한 양식이 하층계급으로 확산되는 구조를 가지게 되는 겁니다. 물질자본, 문화자본, 그리고 시간 자원 접근성. 소비자본주의의 아이러니죠.
이런 기반 아래 '낭만적 사랑'이 진행되기에, 남녀 모두 타인에게 잠시나마 일상을 포기하고 자신과 '로맨스'에 빠지기를 요구하기 위해선 그 자신이 그런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소비 상품으로 스스로를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는 매우 개인적인 의무로 부가되죠.
'독립된 경제력'과 '날 것'의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자제력과 매력. '분위기'와 '라이프 스타일'을 드러낼 수 있는 소비성향. 근대적 이성애와 소비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의 합산품이 현대의 '로맨스 자본주의'라 할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보수쪽보단 진보쪽에 미투가 터지는 건, 돈주고 하는 보수와는 달리 진보는 거저먹으려 들기 때문"이라는 일부 언PC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농담의 이면엔 이런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 통찰이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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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본의 모에 문화의 경우 경쟁에 지쳐 '자기 자신'을 디자인하긴 포기하면서 '모에 상품' '모에 코드'에 대한 소비로 부족한 부분을 벌충해 '로맨스'를 대리만족하는 경향을 가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자기애로 흐르게 되고, '현실 연애'속에 내재된 '열정적 사랑'적 요소에 대해선 모종의 공포마저 느끼게 됩니다. 이를 극단적으로 잘 연출한 단편 에니가 스튜디오 카라의 ME ME ME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2Vmt4n_9c0
정리를 해봄.
사랑은 구분이 됨. 상대를 책임지는 이상론적 사랑, 섹스를 노리는 열정적 사랑, 로맨스를 유지하는 낭만적 사랑. 이상론적 사랑은 비슷한 급의 가문끼리의 결합이 포인트가 되므로 자본유지나 확장과 연관, 열정적 사랑은 하위계층이 부나 지위 상승의 목적을 띄게되니 자본목적성을 띄고, 낭만적 사랑은 그걸 유지하기위해 소비를 하므로 자본에 종속적이다. 따라서 사랑은 자본주의를 떼고 논하기 어렵다.
상업성이 없는 독립영화, 예술영화도 팬이 생길 수 있죠. 이걸 정말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자뱔적으로 관련해서 돈을 쓰죠. 이런걸 감안하면 자본과 사랑을 떼는건 어렵다가 맞을듯.
열정적 사랑에서 하위계층이 자본목적성을 띄게 되는 건 상위 계층이 그런 식으로 프레임을 형성해 유사시 생기는 윤리적, 정서적 책임을 피해가려 한다는 지점도 생각해야 한다는 걸 추가해야겠지요. 나머지는 거의 동감합니다.
살짝 미세조정을 하고 싶은 개인적 욕심이 있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정말 최소 1주는 책읽고 발제해서 1~2시간 토론해야하는 부분이고 사실 전공자도 아닌데 그래서 들이는 노력 이상으로 서로 뭘 얻을 수 있을까도 쫌 회의적이라서 이 정도로...
첫째 "그래서 너는 잘하고 있냐?" 같은 질문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저도 매일 부딫히고 깨지며 새롭게 세워도 번번히 실패하고 좌절 합니다.
그래도 계속 노력을 합니다.
둘째 "죽을 것인데 왜 사냐?" 같은 염세주의적인 생각을 버려주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꽃피우는 것이기에 질 것에 대한 허무함이 아니라 그 순간 꽃이 피웠는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방안에서 창문을 보듯이 관조하며 바라보지 말기 바랍니다."
삶은 폭풍우 몰아치는 현재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치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전제를 하고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나는 "소비자" 이며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지 하기 바랍니다.
소비를 통해서 순간적으로 본인의 위치를 망각 할 순 있어도 돈이 떨어지면 다시 노동자의 지위로 돌아 와야 합니다.
두가지 소비 패턴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나는 지갑에 돈을 두둑히 챙겨들고 백화점에 갔습니다. 그곳 점원들은 나를 주인 모시듯이 떠 받듭니다.
오늘 만큼은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 같습니다. 물론 나의 돈을 보고 하는 것이지만 싫지는 않습니다.
영업잘하는 점원의 가게에서 호기롭게 물건도 구매했습니다.
양손 가득한 쇼핑백을 든 나의 모습들을 주의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봅니다.
양손에는 쇼핑백이 가득합니다.
기세 등등 하게 백화점 문을 나서려는데 얇아진 지갑 생각에 왠지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꽃순이는 짜장면을 무척 좋아합니다. 입가에 짜장 소스를 뭍히고 먹는 모습이 무척 귀엽습니다.
꽃순이가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합니다.
오늘도 꽃순이에게 짜장면을 사주려고 나가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녀가 짜장면을 먹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두 가지 상황은 똑같이 노동자가 돈을 벌어서 소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감각입니다.
이 두 상황에 대한 다른 점을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계급사회일 때 귀족계층들이 모든 것을 독점하였지만 백성들에게 너희는 가장 소중한 사랑을 자유롭게 하지 않느냐? 라고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귀족들은 가문 대 가문이 만나 피를 이어가기 위한 정략적 결혼이 대부분이였고 사랑은 정부를 두어 하는 것이 일반적이였습니다.
그에 비에 일반 백성들은 이리 붙어 먹고 저리 붙어먹고 했습니다.
어찌보면 자유로운 연애 같지만 귀족 계급들의 독점적 권력을 위해 속이는 말에 불과 합니다.
귀족들이 자기들만 쓰고 독점하고자 백성들에게 금욕을 주장하듯이.
현재 자본주의적 환경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속여오고 있습니다.
심지여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를 해서 대립각을 세우던 것을
이제는 더욱 효율이 좋아 지도록 노동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와 연대하며 사랑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습니다.
타자의 타자성이 부정적으로 다가오기에 더욱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부정성을 배재하고자 합니다.
이제 자본주의에서의 자유와 민주주의에서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자본주의에서의 자유는 '돈 쓸 자유' 입니다.
내가 번것을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잇다는 것입니다.
이 돈을 가지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무엇이든지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떨어지면 이 자유는 없습니다.
다시 노동자로 돌아가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지금 제가 만일 쿠바 같은 나라를 간다라고 생각을 하면 무척 부자유 스러울것 같습니다.
어딜 가기도 힘들고 할 것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되고 등등....
그러나 그 동네 사람들은 참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의 자유는 '사랑할 자유' 입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든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무척 어렵습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이 나오면 내 삶은 완전히 바뀌어야 하니까요.
그것을 하지 못하면 나는 불행하고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꽃순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회사에 출근을 하고 싶지 않는다면?'
'애가 둘인 유부녀가 앞집에 새로 이사온 남자가 평생의 이상형이라면?'
진짜 원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원하는 것을 할 자유를 막는 모든것들과 투쟁하게 되어 있으며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교묘하게 파고 드는 자본의 유혹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잘 구별 해내길 바랍니다.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버디우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둘은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이 되며 주변이 모두 조연과 배경으로 전략합니다.
이 배경들이 튀어나오면 사랑은 끝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경험은 누굴 안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이기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관계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방에 있을 때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이 '무수리 주제에 감히!" 같은 이야기를 했다면,
무수리인 어머니가 숙종을 계속해서 임금으로 보았다면 사랑이 되질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순간도 있었겠지만 지속되는 시간을 사랑이라고 하니까요.
돈도 둘 사이 관계에서 튀어 나올수 있습니다.
그 남자 연봉이 1억이라고 한다면 여자는 그 남자의 좋은 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속물인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가 어떻게 고연봉자와 사귀며 결혼을 하게 됬는지 묻겠지요.
'돈은 중요한것이 아니야. 사람이 좋아서지.' 같은 말들을 하겠지만 그건 나중에 되봐야 알겠죠.
남자가 정리해고라도 당하면 입장이 들어날 테니까요.
결혼을 하게 되면 둘의 경험이 더욱 어려워 집니다.
둘이 결혼을 했지만 집안들이 엮기기에 상대 보다 시어머니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 하기도 하고
애라도 생기면 애가 주인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냥 가족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랑이 무척 어렵습니다.
요즘의 소비문화는 욕망과 상상력을 이용해서 백일몽에 빠져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즉, 경험을 동경하고 어떤 대상이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백일몽에 빠지며 상상적, 가상적 방식으로
경험을 맛보는 주체로 자리잡게 합니다.
자아는 소망과 감정을 점점 더 상상적인 방식으로, 즉 상품과 매체 이미지를 통해서 지각하며,
그의 상상력은 소비재 시장과 대중문화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렇게 많은 소비를 통해서 욕망의 선택권이 넓어졌다고 이야기 할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오히려 욕망의 종말을 재촉합니다.
욕망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욕망입니다.
결여의 부정성이 욕망을 자라게 합니다.
욕망의 대상인 타자는 선택의 긍정성속에 있지 않고 부정성입니다.
물론 소비사회가 미디어의 상상적 이미지와 이야기 들을 통해 새로운 욕구와 소망을 산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욕망은 소망과도, 욕구와도 구별되는 어떤것입니다.
환상은 불확정적인 공간에서 거주합니다.
정보와 환상은 서로 대립적입니다.
그러므로, 타자를 이상적인 존재로 만들 능력이 없는 많은 정보로 이루어진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타자의 구성은 정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결여의 부정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아토포스적인 이질성을 가진 타자가 생성됩니다.
오늘의 사회가 환멸이 커지고 있다면 이는 상상의 고조가 아니라 기대의 상승 때문입니다.
과도한 가시성은 상상력에 유익하지 못하며 모든것을 들어내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환상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에로스는 충동 뿐만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을 하기에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수 있습니다.
롤랑 바르트는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순간 이미 (정치적인 권력이 아닌 보다 넓은 범주의 자아와 타자간 상호 전략이란 관점에서) 권력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이를 전복하는 진정한 자유를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마찬가지로 언어를 이용해 그 권력을 속이고 도피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할 수는 있고, 그러한 추구 자체에 문학의 가치, 인간 삶의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푸코는 그런 지점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그건 근본을 바꾸지 못하는 도피일 뿐이라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가능성을 깨닫지 못하고, 만들어진 근대성에 얽매여 진보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둘은 사상적으로도 상호영향관계에 있었고 사적으로도 매우 친했습니다만(실제로 둘은 동성애자로 한 때 연인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 때문에 관점의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답변이 되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감상은 이렇군요. 더 세세한 분석은 여태까지 반복해서 적었던 이유로 불가능해 여기까지만.
"꽃순이가 짜장면을 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문화적 학습의 결과로 행복한것이며, 그렇게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낭만 역시 주입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반론할듯. 이미 철학적 주제이니 더 깊어져봐야겠죠.
인생에서 '나'가 주인공임을 알고 본인의 욕망에 솔직해지되, 타인 역시 타인의 인생에선 주인공인걸 알고서 조율하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죠. 놀이인 RPG에서도 안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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