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 제작자 노트(펌)

시나리오집에 이미 디자인 노트라고 할 만한 것을 길게 늘어 놓아서, 다시 써도 반복되는 말이 될 것 같으니 부담 없이 짧은 글로 써볼까 합니다. 일단은 0 이지만 다른 것이 생각이 나면 그때 더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나리오 제작시의 메인 아이디어는 "RPG에 있어 마스터와 플레이어의 구분은 본질적인 것인가?" 입니다. 제가 공학도이고 게임회사에서 일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시스템의 기반구조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RPG의 초기 모습이 마스터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주사위를 굴려 임의로 지도와 장애물을 정하고 참여자들은 그 장애물을 해쳐나가는 모습이었음을 생각하면, 현재 마스터 - 플레이어 이분법적 구도가 RPG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재 RPG 시스템에서 플레이어가 유의미하게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PC(플레이어 캐릭터) 밖에 없기에, 플레이어는 PC에 과도하게 집착을 하게 되고 이것이 마스터 - 플레이어의 이분법적 구도를 심화시키며 플레이어가 RPG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의 한 측면을 제한하는 면이 강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특정 RPG 시스템에 의한 제한일 뿐 RPG의 본질적인 요소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특정 시스템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럼 현재 RPG 시스템하에서는 전혀 방법이 없을까요? 그런 고민 끝에 나온게 이번 시나리오입니다.

가령 삼국지 캠페인을 예를 들어 봅시다. 마스터 1명과 플레이어 3명으로 구성된 팀입니다. 플레이어는 각각 유비, 관우, 장비를 만들고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대부분 이야기에 있어 핵심적인 분기는 유비 혼자 결정하게 됩니다. 장비가 부각되는 장면은 그나마 장판파정도가 되겠지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끈끈한 결합을 부각시켜 주는 잠시간의 이별 장면도 살리기가 어려워 집니다. 잠시간 유비, 장비는 원소의 휘하에 있고 관우는 조조의 휘하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지만 결국 의형제를 찾아 조조를 떠나는 명장면도 플레이가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장판파 이후로는 장비는 죽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뭐하는지 그다지 부각되지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마스터가 그 이외의 모든 NPC를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아예 등장하지는 않지만 캠페인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장면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나레이션으로?

그런데 가정을 약간 다르게 해보지요. 일단 현재 시스템에서 모두가 마스터를 한다는 것은 무리이므로 대신에 PC를 여럿 사용하는 것입니다.

플레이어1 - "조조", 장비, 황개
플레이어2 - 하후돈, "유비", 주유
플레이어3 - 순유, 관우, "손권"

플레이어들은 삼국정립후 각국의 제후를 PC로 사용하고 위촉오에서 마음에 들며 비교적 캠페인 전반부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을 PC로 선택했습니다. 제갈량이 플레이 하고 싶다면 촉나라에서 비교적 비중이 작은 장비의 플레이어가 장비 - 제갈량으로 바꾸어 플레이 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 = PC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벗어난다면 대국적인 관점에서 캠페인을 보게 되고 캐릭터와 자신을 일체시켜 얻을 수 있는 재미이외에 다른 재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우 천리행을 생각해 보죠.

일반적인 구도에서라면 PC는 관우, 관우를 막는 위의 장수들은 마스터의 NPC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방식을 사용 한다면, 플레이어3이 관우를 하고, 나머지 플레이어 1, 2가 적당히 위의 장수를 사용해서 관우를 막는 식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일단 플레이어 1, 3이 구경꾼으로 관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장면"에 관여한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스터는 부담없이 다른 플레이어가 심심해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관우 천리행 장면을 밀도 있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효과가 있습니다. 단지 관우가 NPC들을 베어 넘기는 것을 보고 재회한 유비, 장비의 플레이어가 느끼는 감정과 자신의 손으로 관우를 막다가 관우가 그것을 해쳐나가는 것을 직접 느낀 후에 유비, 장비의 플레이어로써 느끼는 감정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수평선 너머에서 "부사관 - 병사"의 구도로 사용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4시간 남짓의 단편 시나리오에서 전우애, 전쟁의 참혹함등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나 장편 캠페인에서조차도 PC들은 캠페인 마지막이 아니면 죽을 수가 없기에, NPC들의 희생을 뭔가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하필 PC들만 온갖 험난한 작전에 동원되며 계속해서 PC들만 살아남는 패턴이 어느 정도 반복되어야 합니다. 단편 플레이가 되면 더 어려워 집니다. 제 경험으로 대부분의 단편 플레이에서 원래는 멋있어야 할 장면이 NPC의 오버액션으로만 끝난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너는 결코 못 지나간다!" 라며 혼자서 발록을 막아선 갠달프가 3~4시간 남짓의 플레이에서는 오버 액션하는 NPC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플레이어의 손으로 움직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쉽게 죽을 수 있는 캐릭터를 사용한다면 어떨까요? 시간적, 공간적으로 계속 분리될 수 밖에 없는 현대적 상황에서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지루해지는 것도 막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밀도에도 차이가 생깁니다. 플레이어가 직접 움직이는 것과 마스터의 나레이션으로 끝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캐릭터의 개성을 없앤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병사와 부사관인 PC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플레이어가 둘 다 플레이 한다고 해도 괴리감을 느끼게 되고 병사들의 희생은 아예 남의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래서는 시나리오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에 의도적으로 부사관 캐릭터들에는 군인으로서 가져야하는 필수적인 장단점 이외에는 미미한 정신적 단점만을 하나 넣었고, 다만 기능에 의해서 구별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플레이어 = PC 하나 만은 아니며, 플레이어가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점에는 단지 PC 한명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시나리오를 너무 늦게 수정해서 마스터분들에게 넘긴지라 애초 두번의 테스트 플레이와는 너무 달라져서 시나리오 제작시의 의도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설문지를 보니 일반적이지 않은 개념에 의문을 가지신 분도 계시고, 신선하다며 좋아하신 분들도 계시더군요.

다음번에도 RPG 본연의 재미를 해치지 않는 한도내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해볼려고 합니다. 이것은 RPG의 계절이라는 플레이 행사를 그냥 여러 신기한 시스템을 늘어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즐긴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행사가 아니라 RPG에 대해 뭔가 생각할 만한 꺼리를 얻어갈 수 있으 행사가 되었으면 하는 위원장으로서의 소망도 있고, 많은 시간 RPG를 즐겨오며 나에게 RPG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튼 제일 중요한 것은 재미겠지요. 좋았던 부분도, 아쉬웠던 부분도 어떤 것이든 의견 환영합니다. ^^

댓글 (2)

RNarsis 2005.08.30 11:48
반론은 좀 있다가 적겠다.
세피어스 2005.08.30 18:58
빨리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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