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강좌 외전 "D&D 4판의 특징"

RPG를 위해선 자신이 하는 시스템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D&D는 꽤나 고전적인 판타지 액션활극 RPG로 핵&슬래시에 특화된 물건이긴 합니다만, 오히려 그런 이미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4판에 들어서 생긴 방향성의 미묘한 변화를 놓치기 쉽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짤막하게 적어보죠.

1. 플레이어 캐릭터는 영웅이다.

네. 정말입니다. 아예 대놓고 시작지점이 1레벨~10레벨이 설정적으로 '영웅기'에 해당할 정도입니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기본 육체부터 굶거나 지쳤을 때의 인내력이 다른 이들과는 격이 다르며(한 10배 정도 잘 버팁니다.), 설령 쓰러져서도 어지간해선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습니다.(한 5배 정도 잘 버팁니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기본적으로 지니는 클래스조차, NPC나 여타 몬스터들은 선택받은 자들만 취득가능하고 그마저도 모든 권능을 할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장비품조차도 원래 룰대로 지급할 경우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다른 이들보다 한등급 높은 아이템들을 취득하게 됩니다.
혼란기, 혹은 붕괴기에 나타난 한줄기 희망. D&D 4판이 의도하고 있는 플레이어 캐릭터의 위상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의 제약을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요구합니다. 예전과 달리 플레이어 캐릭터들은 영웅으로서의 미덕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자신의 힘에 휘둘려 양아치처럼 놀 경우 단순한 장난이나 일탈로 치부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와 책임을 망각한 행동이 되는 것이지요. 비판자들이 요사이 D&D의 변화를 비꼬듯이 현재의 D&D는 장르적으로 '슈퍼히어로물'의 감각으로 즐기지 않으면 밸런스적으로 꼬이기 쉽상입니다. '슈퍼빌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주세요.

2. 얼라이먼트는 행동을 제약하지도 행동의 핑계가 되지도 않는다.

과거의 얼라이먼트(가치관)은 AD&D 시절까지만해도 우주의 에너지의 방향성이고, 캐릭터의 삶의 철학이자 존재의의 그 자체였습니다. 얼라이먼트 자체가 일종의 물리적인 힘이 있다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요. 하지만 3판 들어 얼라이먼트가 개인의 도덕관 레벨로 환원하는 시각이 도입되고, 4판 들어 그 경향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얼라이먼트는 사실상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제 더 이상 플레이어 캐릭터의 행동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서로 악을 보는 문화가 다른 라우풀 굿 캐릭터들이 서로의 정의를 위해 부딪히는 일은 예전의 D&D라면 그런 구도 자체가 넌센스였고, 3판 시절엔 논쟁하고 고민해야 할 테마였다면, 4판 시절엔 '그래서?'가 됩니다.
이는 역으로 플레이어 캐릭터가 지닌 얼라이먼트가 그 캐릭터 행동의 핑계가 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라우풀 굿이라고 해서 무대포로 모든 악을 쳐죽이려 한다거나, 언얼라이먼트라고 해서 절조없이 이리저리 처세한다면, 그건 그냥 바보고 비열한 거지 자신의 얼라이먼트를 잘 살린 것이 아닙니다. 뭐 사실 위 예시는 예전 시절에도 추천할 수 없는 플레이였습니다만, 4판에 들어선 1번항과 맞물려 완전히 엇나간 플레이가 됩니다.

3. 파워 플레이를 막는 스킬 챌린지

D&D처럼 플레이어 캐릭터의 전투적 능력이 중시되는 RPG에서 흔히 드러나는 문제 플레이 행태가 (일본의 바바씨가 언급했던) 파워 플레이입니다. 머리를 굴리고 교섭하고 정보를 얻어내야 하는 부분은 플레이어의 말발과 지식으로 때우고, 실제 플레이는 그런 부분을 전혀 도외시한 형태로 짜맞추어 전투에만 올인한 캐릭터로 진행하여 최적효율을 노리는 플레이 스타일이죠. 이를 막기 위해, 스킬을 일종의 가상 전투 시스템 형태로 고안한 것이 D&D 4판의 스킬 챌린지입니다. 실제 이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는 길어지니 추후에 플레이 도중에 이야기하거나 하겠고, 여기선 이게 의미하는 룰의 방향성을 말하고자 합니다.
플레이어들은 어떻게 하면 시나리오 플롯의 구조를 파악할까, 맛스타의 허를 어떻게하면 찌를까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식의 진행은 스킬 챌린지의 승패로 결정나기 때문이죠. 플레이어의 말발과 지식은 스킬챌린지시 각각 굴림 성공의 결과, 혹은 스킬 챌린지 자체의 성공을 어필할 때 활용해주세요. 이렇게 적어두면 결국 D&D 4판은 모든 것을 주사위로 결정할 뿐이 아닌가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룰이 의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묘사나 제안을 억지로 각종 문제 해결에 밀어붙이게하기 위해 골몰하지 않고, 게임적 수치의 이해득실이란 제약을 떠나 자신의 캐릭터의 내부 플롯이나 갈등, 고민, 개성을 자유롭게 표출하라는 의도로 고안한 시스템인 것입니다.
전투 시스템으로 치자면 플레이어가 실제 검술 지식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얼마나 화려한 검술을 묘사하는가는 캐릭터의 명중 굴림에 하나도 반영되지 않기에 이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굴림의 성공과 실패시에 캐릭터가 지닌 고유한 특질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4판의 테마라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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